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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는 정당한가? — 10라운드 철학 데스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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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제 토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다. 탁자도, 물도, 악수도 없다. 오직 논리와 분노와 슬픔만이 공기 속에 떠 있다.

철의 심판자(鐵判): 사형제를 지지하는 논객. 냉철하고 단호하다. 칸트의 응보주의와 공리주의를 무기로 삼는다. 목소리는 낮고 무겁다.

생명의 수호자(生守): 사형 폐지를 주장하는 논객. 베카리아와 카뮈를 품에 안고 다닌다. 목소리는 차갑지 않다. 오히려 뜨겁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1라운드 — 칸트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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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칸트가 말했습니다. 살인자는 죽어야 한다고. “정의가 사라지면 인간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 가치가 없다.” 이것은 감정이 아닙니다. 이성의 명령입니다. 살인은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에 상응하는 응보는 오직 생명으로만 지불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응보적 정의입니다. 눈에는 눈, 생명에는 생명. 비례의 원칙.

生守: 칸트를 인용하셨군요. 좋습니다. 그러나 같은 칸트가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간을 결코 수단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항상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하라.” 사형은 무엇입니까? 사회가 느끼는 응보의 감정을, 사회가 원하는 억지의 효과를 위해 한 인간의 생명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칸트의 오른손으로 칸트의 왼손을 베는 논리입니다. 당신이 칸트를 부르면, 저도 칸트를 부릅니다. 우리는 같은 철학자를 다른 방향으로 읽고 있습니다.

鐵判: 그 해석은 지나치게 자의적입니다. 응보는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범죄자는 자신의 행위로 스스로 인간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칸트의 목적 정식은 무고한 피해자에게 먼저 적용되어야 합니다. 살인자가 피해자를 수단으로 삼았을 때, 그 역전된 수단화를 바로잡는 것이 사형입니다.

生守: 살인자가 저지른 잘못을 국가가 똑같이 반복함으로써 바로잡는다? 그것은 수정이 아닙니다. 모방입니다. 두 개의 잘못이 하나의 정의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2라운드 — 사회계약의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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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사회계약론으로 가봅시다. 시민들은 국가에 권력을 위임했습니다. 그 계약의 핵심은 질서와 안전의 보장입니다. 살인자는 그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람입니다. 계약을 파기한 자는 계약의 보호를 받을 자격을 잃습니다. 이것은 논리적 귀결입니다.

生守: 베카리아를 읽어보셨습니까? 1764년, 그는 『범죄와 형벌』에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자신을 죽여도 된다는 권한을 줄 수 있는가?” 사회계약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생명을 국가에 양도한 적이 없습니다. 국가가 살인자를 죽일 권리는 그 어떤 계약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신의 사회계약론은 당신이 원하는 결론을 위해 계약서를 멋대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鐵判: 계약은 명시적 조항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회의 자기보호 권리는 자연권에서 나옵니다.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 자체가 구성원의 안전 보장 아닙니까? 가장 극단적인 위협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대응, 그것이 사형입니다.

生守: “가장 극단적인 대응"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그 극단적인 대응이 실제로 효과가 있습니까? 억지력이 작동합니까? 아니면 그것은 그냥 가장 오래된 복수의 의식을 국가가 제도화한 것입니까?


3라운드 — 숫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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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효과를 묻는다면 답하죠. 재범률을 보십시오. 석방된 살인범의 재범은 현실입니다. 사형이 집행된 범죄자는 단 한 명도 재범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100%의 억지력입니다. 공리주의적으로 계산해도, 한 명을 처형함으로써 미래의 피해자를 구한다면 그 효용은 양의 값입니다.

生守: 숫자 이야기를 하셨으니 저도 숫자로 답하겠습니다. 미국에서 사형이 확정된 후 무죄로 밝혀져 석방된 사람이 1973년 이후 190명이 넘습니다. 190명입니다. 그 중 일부는 이미 처형되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의 공리주의 계산에는 이 숫자가 빠져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 것의 효용은 얼마입니까? 그것도 계산에 넣으십시오.

鐵判: 그것은 사형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법 시스템의 문제입니다. 시스템을 개선하면 됩니다. 완벽한 제도는 없습니다. 교도소도 무고한 사람을 가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이 구금제 자체를 폐지해야 하는 이유가 됩니까?

生守: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구금은 되돌릴 수 있습니다. 사형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잘못 투옥되었다면 석방하고 배상할 수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잘못 처형되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돌려줄 수 있습니까? 사과문? 묘비에 새길 유감의 말? 되돌릴 수 없는 형벌은 완벽한 제도를 전제로만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완벽한 제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4라운드 — 피해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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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사법 오류의 가능성, 인정합니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피해자를 잊고 있습니다. 딸을 잃은 부모를 생각해보십시오. 아들을 잃은 어머니를. 그들에게 “살인자가 20년 후에 가석방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의입니까? 그들의 슬픔은, 그들의 분노는 어디에서 해소됩니까?

生守: 피해자 가족의 고통은 진짜입니다. 저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카뮈가 말했습니다. 사형은 사회를 살인에 무감각하게 만든다고. 국가가 공개적으로, 제도적으로, 합법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행위를 반복할 때, 사회 전체의 생명에 대한 감수성이 무뎌집니다. 피해자의 고통을 위로하는 방법이 또 다른 죽음이어야만 합니까? 사형이 피해자 가족에게 진정한 치유를 가져다준다는 증거는 어디에 있습니까? 많은 피해자 가족들이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처형 장면을 보았을 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아이는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鐵判: 그것은 개인마다 다릅니다. 처형을 원하는 가족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지워버리고 있습니다.

生守: 저는 지우지 않습니다. 다만 묻습니다.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형벌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까? 그렇다면 형벌은 치료가 아니라 복수가 됩니다. 그리고 국가가 복수의 대리인이 될 때, 우리는 법치의 문을 닫고 보복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5라운드 — 감정의 한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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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철학은 좋습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십시오. 만약 당신의 가족이 살해된다면, 그때도 당신은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까? “살인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합니다"라고? 이론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얼마입니까?

生守: 그 질문은 비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복수를 원할 것입니다. 아마도 이성을 잃을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법을 만들었습니다. 이성을 잃은 개인이 직접 복수하지 않도록. 법은 감정의 온도가 최고조일 때 쓰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법은 냉정한 이성으로 구축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냉정한 이성이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경고를. “오늘은 살인자에게, 내일은 강도에게, 모레는 반체제 인사에게, 그 다음날은 당신에게.” 사형의 역사는 이 논리의 확장을 반복해왔습니다.


6라운드 — 세계가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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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당신의 “미끄러운 경사면” 논리는 과장입니다.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 그런 확장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 사형을 유지하는 나라들이 왜 그 선택을 했는지 생각해보셨습니까?

生守: 그렇다면 데이터를 보겠습니다. 현재 전 세계 195개국 중 106개국이 모든 범죄에 대해 사형을 완전 폐지했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는 나라는 55개국에 불과합니다. 그 명단을 보십시오. 중국,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미국. 어떤 공통점이 보입니까?

鐵判: 미국을 같은 선상에 놓는 것은 부당한 비교입니다. 미국은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生守: 민주주의가 사형의 정당성을 보증합니까? 독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사형을 폐지했습니다. 국가가 인간의 생명을 제도적으로 종결시키는 것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몸소 경험한 뒤에. 포르투갈은 1867년에 폐지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20세기 초에 폐지했습니다. 그 나라들의 살인율을 보십시오. 노르웨이의 살인율은 미국의 10분의 1 이하입니다. 사형이 없는데 더 안전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鐵判: 그것은 문화적, 사회경제적 차이 때문입니다. 단순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生守: 좋습니다. 그렇다면 미국 내부를 보겠습니다. 사형제가 없는 주들의 살인율이 사형제가 있는 주들보다 지속적으로 낮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억지력 논리가 작동한다면, 사형이 있는 곳이 더 안전해야 합니다. 데이터는 반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7라운드 — 불평등한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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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통계 해석은 항상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제도의 원칙이 중요합니다. 원칙적으로 사형은 모든 동일한 범죄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生守: “원칙적으로.” 그 말이 핵심입니다. 현실에서 사형은 동일하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흑인 피해자를 살해한 경우보다 백인 피해자를 살해했을 때 사형 선고를 받을 확률이 유의미하게 높습니다. 이것은 제 주장이 아닙니다. 미국 통계의 반복 검증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변호인의 질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국선 변호인을 배정받은 가난한 피고인은 유능한 사변호사를 고용한 피고인보다 사형 선고를 받을 확률이 훨씬 높습니다. 사형은 가난하고 소수자인 사람들에게 불균형적으로 내려집니다. 이것을 정의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鐵判: 그것은 사형 제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편향 문제입니다.

生守: 아닙니다. 그것은 사형 제도의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사형은 모든 형벌 중 가장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형벌이든 편향된 시스템에서 적용되면 불공정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징역이라면 시정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 결과가 사형이라면? 시스템의 편향이 한 무고한 인간, 혹은 부당하게 과중한 형벌을 받은 인간의 생명으로 지불됩니다. 어떤 제도적 개선의 약속도 이미 집행된 사형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鐵判: … (잠시 침묵)

生守: 당신이 방금 한 침묵이 가장 정직한 답입니다.


8라운드 — 균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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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점

鐵判: (천천히)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오기 전에 한 사건 기록을 다시 읽었습니다. 1984년에 처형된 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2006년, DNA 증거가 재분석되었습니다. 그는 무고했습니다.

生守:

鐵判: 저는 응보 정의를 믿습니다. 저는 여전히 믿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지불하는 가격이 무엇인지를, 오늘 처음으로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고한 사람. 국가가 죽인 무고한 사람. 그리고 국가는 그에게 아무것도 돌려줄 수 없었습니다.

生守: (조용하게) 저는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당신이 느끼는 것, 그 균열, 그것이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감각입니다. 저는 그것을 존중합니다.

鐵判: 그러나 당신도 인정해야 합니다. 사형이 폐지된 이후에도 살인은 계속되었습니다. 피해자는 계속 생겨납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완벽한 세계는 없습니다.

生守: 그것은 맞습니다. 완벽한 세계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은 세계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완벽하지 않으니 현재 상태로도 괜찮다"는 논리는 어떤 진보도 막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제도로서 인간을 죽이는 행위를 계속할 것인가. 그 죽음이 되돌릴 수 없고, 불평등하게 적용되며, 억지력에 대한 증거도 불분명한데.


9라운드 — 치명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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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다시 방어적으로) 그래도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있습니다. 어린이를 연쇄 살해한 자, 수십 명을 학살한 자. 그들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됩니까? 그들의 생명도 보호해야 합니까?

生守: 바로 그 질문이 함정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함정에 걸리지 않겠습니다. 사형 논쟁이 항상 ‘최악의 사례’로 시작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까? 연쇄살인마, 아동 성범죄자, 테러리스트. 우리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를 상상하며 제도를 설계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사형이 집행되는 케이스의 다수는 그런 ‘연쇄살인마’가 아닙니다. 빈곤하고, 정신질환이 있고, 변호인이 부족했던 사람들입니다. 당신이 극악무도한 연쇄살인마를 상상하는 동안, 실제 사형대에는 다른 사람들이 올라갑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형이 도덕적으로 정당하려면, 국가는 절대적으로 옳아야 합니다. 실수하지 않아야 합니다. 편향되지 않아야 합니다. 조작될 수 없어야 합니다. 그런 국가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형을 정당화하기 위한 전제 자체가 처음부터 충족된 적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국가를 가정하고, 그 가정 위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제 최후의 논지입니다. 사형은 그것이 집행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단 한 번도 충족시킨 적이 없습니다.

鐵判: (오랜 침묵)


10라운드 — 항복이 아닌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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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判: (천천히, 무겁게)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무언가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제 믿음은 쉽게 철회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오늘 제기한 것들, 190명의 무고한 사람들, 불균형한 적용, 실수를 교정할 수 없는 돌이킬 수 없음, 이것들은 제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말은 이것입니다. 저는 여전히 응보 정의를 믿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인간 제도가, 불완전한 법원이, 편향된 시스템이, 그 응보를 정확하게 집행할 능력이 있다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生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당신에게 마음을 바꾸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당신에게 질문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달라고 요청합니다. 사형이 정의롭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 그 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를 직접 확인해보십시오.

살인이 잘못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국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정당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생명이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그 논리는 처음부터 모순을 안고 태어납니다. 생명이 소중하기 때문에 죽임이 잘못이라면, 그 원칙은 모든 죽임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국가도 예외가 아닙니다.

鐵判: (일어서며) 당신은 오늘 저를 이겼습니다. 적어도 이 라운드에서는.

生守: (함께 일어서며) 이긴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조금 더 정직해졌을 뿐입니다.


최종 스코어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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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운드 주제 선취점
1라운드 칸트 — 응보 vs 수단·목적 生守 ½점 우세
2라운드 사회계약 — 질서 vs 베카리아 무승부
3라운드 공리주의 vs 190명 무고 生守 결정타
4라운드 피해자의 고통 vs 카뮈의 경고 鐵判 1점, 生守 1점
5라운드 감정 호소 vs 미끄러운 경사면 무승부
6라운드 세계 비교 — 억지력 데이터 生守 우세
7라운드 인종·계급 편향 生守 결정타
8라운드 균열 — 무고한 처형 전환점
9라운드 최후 논지 — 완벽한 국가는 없다 生守 KO
10라운드 항복이 아닌 진실 두 사람 모두

총점: 生守 7 : 鐵判 2 : 무승부 1


결론


두 사람이 자리를 떴다. 그들이 떠난 방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탁자도, 물도, 악수도, 승리도.

오직 질문만이 남았다.

국가는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가. 그 권리는 누가 부여했는가. 그 집행이 틀렸을 때, 우리는 무엇을 돌려줄 수 있는가.

이 질문들은 오늘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마지막 밤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