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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질은 발견인가, 발명인가 — 사르트르와 인권

·225 단어수·2 분
작성자
Engineer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 불렀다. 사르트르는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고 했다. 늑대에게 길러진 아이의 이야기는 본질의 고정성을 흔들고, 촘스키의 보편문법은 생물학적 공통점을 다시 밝힌다. 보편 구조가 있다고 해서 그 내용이 영원히 선한 것은 아니다. 고전 본질론은 여성과 노예를 덜 인간으로 분류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 진화심리학의 just-so 내러티브도 권력이 현상을 정당화할 때 조심스럽게 읽어야 한다. 그렇다고 인간 사이에 아무 연속도 없다고 하면 인권의 언어가 허공에 뜬다. 한쪽은 본질이 있다고 믿으며 나태해지고, 다른 쪽은 본질이 없다고 믿으며 방치할 위험이 있다. 흥미로운 타협은 이것이다. 본질의 ‘내용’에 대한 확신은 내려놓되, 본질이 ‘있어야 한다’는 실천적 믿음은 남긴다. 혹은 인권을 하늘이 내린 발견이 아니라 역사 속 합의의 발명으로 본다. 발명이라 해서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깨지기 쉬운 것일수록 더 치열하게 지켜야 한다는 각오로 이어진다. 인간이란 질문은 정의가 아니라 책임의 문법이다. 우리는 매일 그 답을 행동으로 덧쓴다.

장애인, 난민, 노동자, 아이의 권리는 정의서 한 줄로 끝나지 않는다. ‘인간답다’는 말이 누구의 몸을 기준으로 형성되었는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 생명 윤리와 디지털 권리가 겹치면 정의는 더 복잡해진다. 뇌와 기계의 경계에서 인간 범주를 다시 그릴 때, 차별의 옛 주판이 되살아나지 않게 조심하라. 본질을 찾는 열정이 누군가를 문 밖으로 밀어내면 그 열정은 악이다. 반대로 본질을 포기한 듯한 상대주의가 무관심을 낳으면 그것도 악이다. 철학은 줄타기를 가르친다. 밧줄 아래에는 연대가 있다. 정의의 언어를 가난하게 쓰지 말고, 연민의 언어를 가볍게 쓰지도 말자. 두 언어를 동시에 쥘 때 인간 범주는 열린다. 문을 열고 나서도 손을 놓지 않는 일, 그것이 오늘의 철학 실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