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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지면 나는 어디까지 나인가 — 로크와 무아

·221 단어수·2 분
작성자
Engineer

로크는 인격의 동일성을 기억의 연속에 두었다. 데카르트는 기억이 빠져도 지금 사유하는 순간에 ‘나’가 있다고 했다. 치매에 걸린 이가 가족을 알아보지 못할 때, 관계 속의 나는 흔들린다. 그러나 기억이 곧 나라면 위험한 반문이 있다. 로프터스가 보여 주듯 기억은 떠올릴 때마다 재구성된다. 그렇다면 이야기의 연속은 처음부터 완전한 기록이 아니다. 찢어진 책도 책이라는 말은 설득력이 있지만, 페이지가 모두 날아간 표지만 남은 책을 무엇이라 부를지는 난해하다. 불교는 무아를 말하며 고정된 실체를 거친다. 음악에 눈물 흘리나 이유를 모르는 순간, 무의식과 체화된 습관이 ‘나’의 잔광을 남긴다. 기억 초월론은 몸과 순간의 경험에 기대고, 기억 정체성론은 서사의 연속을 강조한다. 둘 다 부분적 진실을 가진다. 현대인은 SNS와 진단서 사이에서 정체성을 고친다. 중요한 건 단정이 아니라 태도다. 기억이 흐려진 이에게 여전히 예의와 돌봄을 바치는 것은 ‘같은 사람’ 여부의 판정 게임이 아니라 윤리의 문제다. 나는 기억의 합이면서, 기억이 고장 난 뒤에도 타인에게 호명되는 이름을 가진 존재다.

디지털 기억은 외장하드처럼 늘어나지만, 정체성은 여전히 몸의 리듬과 관계의 속도에 묶여 있다. SNS 프로필이 과거의 나를 고정시키면, 살아 있는 수정은 더 고통스러워진다. 테세우스의 배처럼 세포는 바뀌어도 ‘나’라는 내러티브는 끈을 잡고 이어진다. 철학이 해주는 일은 판정이 아니라 자비다. 기억이 희미한 이를 작은 존재로 줄이지 말라는 요청이다. 돌봄의 윤리는 동일성 증명서가 아니라 반복된 방문과 목소리의 온도에서 나온다. 기억이 곧 나라는 공식은 설명력과 폭력성을 함께 지닌다. 우리는 공식을 내려놓고 사람을 남겨야 한다. 정체성 논쟁은 삶의 온도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할 때가 있다. 이론은 손을 씻게 하지만, 관계는 손을 잡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