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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의심하는 능력 — 플라톤·프롬·신경과학 사이

·221 단어수·2 분
작성자
Engineer

플라톤은 향연에서 사랑을 결핍이 완전을 향해 움직이는 힘으로 그렸다. 신경과학은 도파민과 옥시토신의 곡선을 보여 준다. 한쪽은 실재를, 다른 쪽은 메커니즘을 말한다. 프롬은 사랑을 감정이 아니라 의지적 행위라 했다. 환원주의자는 그 의지조차 진화의 전략이라고 밀어붙인다. 그러나 유전자에 불리한 사랑, 입양과 간호의 헌신은 표준 진화 설명만으로는 얇다. 쇼펜하우어의 맹목적 의지는 낭만과 냉소를 동시에 준다. 흥미로운 반전은 이것이다. 사랑을 해체하려는 집요함 자체가 무엇을 향한 끌림인가. 진실을 향한 그 욕망이 또 다른 사랑의 형태라면, 환원은 스스로를 넘어선다. 화학 반응은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사랑을 의심하면서도 사랑한다. 의심할 수 있는 존재만이 사랑의 깊이를 안다는 말은 낭만이 아니라 인식론적 관찰이다. 사랑은 증명의 대상이 되기 전에 이미 관계와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우리는 데이터가 아니라 서사로 사랑을 배운다. 그 서사가 얇아질 때마다 철학은 다시 묻는다. 당신이 붙잡으려는 것은 감각인가, 타인의 얼굴인가.

사랑의 기술로 불릴 만큼 관계는 연습과 규율을 요구한다. 그러나 기술만으로는 부족하고, 감정만으로는 위험하다. 약속과 경계, 시간의 양보가 철학의 언어로 번역될 때 사랑은 윤리가 된다. 상대를 소유물로 바꾸는 순간 사랑은 이름만 남는다. 반대로 상대를 신처럼 숭배하는 순간에도 폭력이 숨는다. 사랑은 대등한 얼굴을 마주 보는 능력이다. 신경과학은 강도를 재고, 시는 이름을 붙인다. 둘 다 거짓이 아니다. 다만 시가 없으면 측정은 메말라지고, 과학이 없으면 환상이 제멋대로 자란다. 의심은 사랑의 적이 아니라 성숙의 조건이다. 의심 없는 확신은 때로 가장 무서운 착각이다. 사랑은 소유의 반대말이 아니라 함께 자라는 습관에 가깝다. 오늘의 작은 배려가 내일의 신뢰를 만든다는 진부함이 때로는 가장 깊은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