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누구나 손을 뻗는다고 했다. 홉스는 자연 상태를 만인의 투쟁이라 불렀다. 둘은 같은 인간을 놓고 다른 풍경을 그렸다. 성악론자는 법이 사라지면 무엇이 일어날지 역사를 들고, 성선론자는 재난 속 줄 서기와 돌봄을 든다. 도킨스는 이타성을 이기적 유전자의 전략으로 해석하지만, 무혈연 자기희생 앞에서 그 설명은 막힌다. 죽음 뒤에 올 보상도 없는 선택은 계산으로만 환원하기 어렵다. 반대로 선함을 본능이라 단정하면, 전쟁과 학대의 반복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성선론자는 구조의 실패라 답하고, 성악론자는 평균이 진실이라 답한다. 논쟁의 끝에서 남는 건 단순하다. 인간이 순수하게 악하다는 강한 주장은 버거워지고, 선함이 본성이든 습관이든 인간은 선할 수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본성’이라는 단어는 정치에서 남용되어 왔다. 여성과 노예를 이성 밖으로 밀어낸 아리스토텔레스식 본질론이 교훈이다. 오늘의 윤리는 발견된 본성보다, 어떤 제도가 선을 선택하기 쉽게 만드는지를 묻는 편이 낫다. 선과 악의 온도계는 개인의 장 속보다 거리와 제도의 설계에 달려 있다.
아이의 공감 실험과 유아기의 소유욕은 동시에 진실을 말한다. 발달은 선과 악의 레이어를 겹쳐 쌓는다. 도덕교과서가 말하는 본성보다 중요한 것은 신뢰를 누적시키는 규범이다. 반복된 협력 게임에서 이타는 이기의 장기 전략이 될 수 있지만, 그 안에서도 배신과 용서의 드라마는 사라지지 않는다. 성악론이 역사의 피를 들고, 성선론이 일상의 돌봄을 들면, 철학은 어느 한쪽 판정을 내리기보다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한다. 인간은 선할 수 있으나 항상 선하지는 않는다는 평온한 문장이 가장 무겁다. 그 문장을 전제로 민주주의와 법은 설계된다. 선을 강요하는 도덕은 악을 낳고, 악을 전제하는 제도는 선을 잉태하기 어렵다. 중도는 나약함이 아니라 복잡함의 정직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