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게이츠의 성공을 노력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을 씌우면, 국적·계급·유전·시대를 모른 채 ‘열심히 하면 된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탈레브가 말한 묘지의 역설처럼, 실패한 노력가는 보이지 않는다. 생존자 편향은 노력 신화를 강화한다. 그렇다고 운만 들먹이면 인간 행위 전반이 무의미해지고, 설득과 책임 같은 실천 언어가 붕괴한다. 순수 운론은 허무주의로 떨어지기 쉽다. 스토아는 말했다. 결과는 통제할 수 없어도 태도와 실천은 고를 수 있다고. 노력론자가 결국 인정하는 ‘최소한의 환경’은 이미 운의 이름을 띤다. 반대로 운을 인정한 뒤에도, 비슷한 조건 안에서는 준비가 기회를 붙잡는다는 통찰은 남는다. 파스퇴르의 말처럼 행운은 준비된 자에게 온다는 명제는 결정론이 아니라 확률과 습관의 윤리다. 출발선의 불평등은 정치적으로 다루어야 할 문제이고, 개인의 덕목만으로 흡수할 수 없다. 그럼에도 삶을 전부 운에 맡기면, 우리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는 청관으로 남는다. 운을 인정하되 노력을 선택하는 것, 그 베팅 위에 자기존중이 서 있다.
정의 관점에서 보면 출발선 보정은 개인 덕목을 넘어선다. 교육·의료·주거의 최소 보장은 운의 산만을 줄이는 장치다. ‘열심히 해라’는 구호가 구조적 장벽 앞에서 사람을 고립시킬 때, 그 구호는 폭력이 된다. 반대로 제도가 모든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남는 건 겸손한 자기효능감과 정치적 연대의 결합이다. 성공담을 들을 때는 숨은 표본을 떠올리고, 실패담을 들을 때는 숨은 운을 상상하라. 이중 작업이 없으면 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칭찬하고 너무 쉽게 단죄한다. 노력과 운의 변주곡은 개인사이자 공동체의 윤리다. 창업가의 자서전을 읽을 때와 구조조정 통보를 받은 이의 하루를 상상할 때 같은 잣대를 쓰는지 돌아보라. 겸손은 덕목이자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