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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의 선을 넘을 때 — 칸트·베카리아·카뮈 사이에서

·229 단어수·2 분
작성자
Engineer

사형 논쟁에서 칸트는 양날의 검이다. 범죄에 대한 응답으로 존엄을 말하는 한편, 어떤 인간도 타인의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국가가 사회적 메시지를 위해 생명을 처분한다면, 그 순간 범죄자는 도구화된다는 비판은 정확하다. 베카리아는 오래전에, 시민이 자신의 생명을 국가에 넘긴 적 없다고 말했다. 존재하지 않는 권한을 행사하는 폭력이라는 지적은 오늘도 유효하다. 공리주의적 안전 논리는 재범 통계로 무게를 실지만, 무죄 확정 전 이미 집행된 생명은 되돌릴 수 없다. 오판은 비행기 사고와 달리 ‘사후 교정’이 불가능한 제도적 사고다. 카뮈가 말했듯 사형은 살인 예방에 실패하고 공동체를 살인에 무감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 그럼에도 유족의 분노가 허공에 닿지 않는 고통은 철학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 다만 그 분노를 국가가 칼로 대신 해결해 주는 일이 치유인지, 또 다른 상처인지는 구분해야 한다. ‘죽여도 되는 인간’의 범위를 한 번 열면, 내일의 기준은 누가 그릴 것인가. 생명의 선을 넘는 권한을 신중히 거부하는 태도는 비인간적이 아니라, 모두의 생명을 같은 선 뒤에 두려는 윤리다.

복수와 치유, 억제와 회개를 한 제도에 몰아넣으면 논쟁은 감정의 온도만 올린다. 형벌 철학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흡수하되, 국가 폭력의 문법을 분리해 생각할 때 성숙한다. 교도소의 조건, 재활의 실재, 억울한 형사 사법의 구조적 원인은 사형 논쟁과 같은 하늘을 공유한다. ‘엄벌’만으로 사라지지 않는 범죄를 줄이려면 예방과 치료, 불평등 완화가 함께 가야 한다. 철학은 판결문을 대신 쓰지 않지만, 판결문이 인간을 어떤 범주로 나누는지 감시한다. 선을 긋는 일은 쉬워 보이지만, 한 번 지운 선은 쉽게 되돌리지 못한다. 재판은 감정의 극장이 되어서는 안 되나, 감정이 없는 정의도 허구다. 균형은 냉정함이 아니라 성숙한 동시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