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도시에 몇 년째 살고 있어도 여전히 처음 보는 골목이 있습니다. 지하철역에서 직장까지, 집에서 마트까지, 우리는 대부분 정해진 경로만 반복합니다. 지도 앱이 알려주는 최단 경로, 매일 타는 버스. 이 루트만 다니다 보면 같은 도시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이 듭니다.
방법론: 플라뇌르(Flâneur)처럼 걷기 #
19세기 파리에서 시작된 개념인 ‘플라뇌르’는 목적 없이 도시를 배회하는 사람입니다. 샤를 보들레르가 처음 쓴 이 단어는 지금도 도시 탐험의 한 방식으로 통용됩니다. 핵심은 목적지를 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산책의 목표는 ‘동쪽으로 30분’처럼 방향만 정하거나, ‘처음 보는 간판이 있는 골목을 발견하면 들어가기’처럼 작은 규칙 하나만 갖고 나서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게 되는가 #
목적 없이 걷다 보면 평소에 무심코 지나쳤던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건물의 층: 길을 걸을 때 대부분 1층 가게만 봅니다. 위를 올려다보면 2층, 3층에 전혀 다른 세계가 있습니다. 작은 스튜디오, 오래된 사무실, 숨어 있는 카페들.
시간의 흔적: 새 건물 옆에 붙어 있는 낡은 건물, 벽에 남아 있는 오래된 페인트 글씨, 폐업한 가게의 유리창. 도시는 시간의 단면들이 겹쳐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 같은 골목에서도 시간대마다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전의 배달 라이더, 오후의 노인분들, 저녁의 직장인들. 같은 공간이 시간에 따라 다른 색을 갖습니다.
도구: 카메라 하나면 충분 #
걷는 동안 눈에 띄는 것을 사진으로 남겨두면 좋습니다. 거창한 카메라가 아니어도 됩니다. 스마트폰으로 충분합니다. 단, 사진을 많이 찍으려 하지 마세요. 그러면 걷는 내내 화면만 보게 됩니다. 정말 마음을 끄는 것만, 한 장씩.
서울에서 걷기 좋은 방식 #
서울은 골목 탐험에 특히 좋은 도시입니다. 큰 길 뒤에는 반드시 작은 골목이 있고, 그 골목마다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시작 방법: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지도를 보지 않고 걷습니다. 낯선 골목이 나오면 들어가보고, 막히면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나중에 지도 앱으로 현재 위치를 확인하면 내가 예상치 못한 곳에 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좋은 시간대: 이른 아침의 도시는 다른 얼굴을 합니다. 가게들이 문을 열기 전의 조용한 골목, 청소부가 쓸고 있는 거리, 첫 손님을 기다리는 카페. 일요일 오전 7~8시의 도시는 완전히 다른 공간입니다.
걷기의 부산물 #
규칙 없이 걸을 때 종종 머릿속에서 해결되지 않던 생각이 풀리는 경험을 합니다. 걷는 동작 자체가 좌뇌와 우뇌를 번갈아 자극하는 양측성 자극(bilateral stimulation)이기 때문에 트라우마 치료에도 쓰이는 기법입니다.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 걷는 것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보다 해결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도시는 이미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주말, 한 정거장 일찍 내려서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